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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

[소설] 34장의 사진 2

by va_ra 2025.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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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증명

서랍 속에 상자를 다시 넣으려다 멈췄다.

상자를 기울이는 순간,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고 봉투들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모두 날짜가 적힌 익숙한 봉투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얇고 납작한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작은 수첩 하나였다.

봉투들 사이에, 마치 숨기듯 끼워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첩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송달 완료’라는 단어와 함께 액수가 쓰여 있었다.

 

‘2008년 3월 송달 완료 648,000원.’

‘2008년 4월 648,000원.’

‘2008년 5월 648,000원.’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들에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송달 완료라는 문구가 적힌 달, 그리고 이어지는 몇 개월의 입금 기록

다시 ‘송달 완료’가 찍히는 달이 오면, 사진을 보냈던 시점이 떠올랐다.

 

나는 무릎 위에 수첩을 올려둔 채 멍하니 숫자들을 따라가다가,

손가락으로 2024년의 페이지를 눌러 넘겼다.

‘2024년 3월 송달 완료. 2,060,000원.’

내가 열 일곱살이 되는 해 그리고, 엄마가 보낸 마지막 사진

 

사진 한 장마다, 정확히 그 다음 달에 입금된 돈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최저임금 수준의 돈이 매달 빠짐없이 들어왔다.

18년이 넘도록

 

나는 수첩을 들고 자리에 기대 앉았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이 수첩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저 낡은 상자 속, 봉투들에 파묻힌 채 조용히 숨겨져 있었다.


표지도 없이 낡은 속지에 눌러 쓴 글씨들.
연도, 월, 송달 완료,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숫자

매년 빠짐없이 반복된 기록
사진을 보낸 달에는 ‘송달 완료’와 함께 정해진 금액이 붙어 있었고,
그 다음 달부터는 오직 금액만 적혔다.

 

사진 한 장을 보내고, 한 달에 한 번
마치 월급처럼, 정확히 도착한 돈

그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증명서였고, 영수증이었고,
그건 거래였다.

 

그런데 엄마는, 왜 내게 그렇게 말했을까?

 

‘왜 너는 아빠를 하나도 닮지를 않아서, 내가 기억하는 얼굴까지 잊히게 하니.’

 

그 말은 이상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땐 그게 원망이라 생각했다.
아니, 애정이라 믿고 싶었다.
엄마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사람이었고,
그 슬픔을 딸에게 전가한 거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수첩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엄마는 매달 사진을 보내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았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단 한 줄의 메모도 없이

사진은 편지가 아니었다.


그건 증명서였고, 영수증이었고,
무언가를 보여주는 대가로 무언가를 받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왜 엄마는, 아빠를 그렇게까지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말했을까?


왜 스스로를 상처 입은 사람처럼 만들었을까?


왜 아빠를 기억에서 지워버리지 못했을까?

 

나는 수첩을 덮고,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에 묻히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기록

그 안에서 나는, 엄마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움과 거래, 애증과 생활

 

나는 문득, 아빠가 사진 속 얼굴을 몰라봤던 표정을 떠올렸다.

정말 한 번도, 사진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면, 이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거래였을까

나는 사진을 찍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엄마는 유난히 조용했고, 이상하리만치 다정했다.
머리를 빗겨주고, 옷깃을 다듬고, 렌즈를 바라보라며 등을 살짝 밀어주던 손길
그건 평소의 엄마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들을 오랫동안 특별한 기억으로 품고 있었다.
엄마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 몇 안 되는 증거처럼
나 혼자만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다정함조차 오직 사진 한 장을 위한 연출이었다.

엄마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그 한 순간만 감정을 꺼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장의 사진, 한 장의 증명서.
그게 매달의 돈으로 바뀌었다.

 

나는 아마,
아빠가 엄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걸지도 모른다.
엄마는 자신이 아닌 나라도, 아빠의 기억에 닿기를 바랐던 걸까


한 장의 사진 속, 자신을 닮은 내 얼굴로라도

 

그 생각이 들자
엄마가 유독 사진을 찍는 날만 다정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날만큼은, 내가 아니라 아빠를 향해 웃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말하지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저 모든 걸 사진 한 장에 담아 보내며 살아냈다.

그 사실이, 마음 어딘가를 서늘하게 얼렸다.

나는 수첩을 다시 가슴팍에 껴안았다.
그 안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모든 게 들어 있었다.

 


 

 

3장. 정리

 

주말이었다.
어제의 방문 이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처럼 이불을 개고,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바깥은 적막했고, 어제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 너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진관 유리문을 통해 어렴풋이 보이는 익숙한 얼굴


아빠였다.

어제보다 훨씬 익숙해진 얼굴이라서일까, 문득 반가운 감정이 스치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가게는 내놨다.”


아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엄마도 없는데, 네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잖아. 오늘은 짐 정리하러 왔다.”

 

어제 그렇게 다녀간 게 이 때문이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차분했고, 실용적인 말투로 덧붙였다.

 

“지금 챙길 수 있는 거 챙겨.

소모품은 나중에 사면 돼.
교복, 일단 당장 필요한 옷 몇 벌, 네가 꼭 갖고 있어야 하는 것들만”

 

나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교복과 속옷 몇 벌, 오래 입던 셔츠 두 장, 작은 필통과 책 한 권, 그리고.. 어제 다시 열어봤던 상자
그 상자를 조심히 캐리어 위에 올려두었다.

 

거실 한쪽, 오래된 선반 위에는 엄마가 늘 쓰던 사진기가 있었다.
엄마가 일할 때도, 가족 사진을 찍을 때도 늘 들고 있던 그것.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가지고 갈까, 말까
손을 뻗었다가, 다시 멈췄다.
그걸 조용히 지켜보던 아빠가 말했다.

 

“그건… 소모품이잖아.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거면, 새로 사줄게”

 

그 말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엄마가 남긴 건데, 그걸 그냥 버려요?”

 

내 말에 아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겼다라..그거 원래 내 거야
그 여자가 썼다고 유품 되는 건 아니지
어차피 다 버리고 가

의미 없어.”

 

그 말에, 안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상자를 거칠게 열어젖히고, 그 안을 뒤적였다.
봉투 사이로 수첩이 손에 닿자, 움켜쥐듯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수첩을 두 손에 쥐고, 아빠에게 내밀며 화를 터뜨렸다.

 

“이거 뭐예요? 이거 도대체 뭐냐고요.”

 

아빠는 의아한 눈빛으로 수첩을 받았다.
한 장씩 넘기며 안을 들여다보더니, 작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거래 명부잖니.”

 

그 말이 끝나자, 나는 아빠 손에서 수첩을 거칠게 가로챘다.

“거래 명부요? 그럼 지금까지 이 모든 게… 전부 거래였다는 거예요?”


숨이 끊길 듯 터져나왔다.
“엄마는 항상… 아빠를 그리워했다고요!”

 

아빠는 한 치의 감정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워하는 척을, 너한테 보여준 거겠지.
그 여자랑 난 거래 관계였어.
사진이 오면 돈을 보내는, 그 정도의 사이였지.
그런데 올해 사진이 안 왔어.
그래서 어제 확인하러 왔고, 네가 말했잖아.
그 여자, 죽었다고.
그래서 오늘은 정리하러 온 거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수첩을 내려다보는 시야가 흐릿했다.
눈물이, 수첩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아닐 거라고, 그래도 엄마는.. 하고 마음속에서 부정해왔는데,
막상 아빠의 입으로 듣고 나니, 그 모든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나를 부수고 있었다.

 

엄마에게 맞았던 수많은 날들,
나는 그게 아빠를 볼 수 없었던 화풀이였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건 단지 목적 없는 분노였다.
그저 갈 길 잃은 폭력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그냥 견디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흐느끼며 물었다.

“그래서요… 이제 저도… 버리러 가는 거예요?”

 

아빠는 잠시 내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버릴 거였으면, 내가 직접 찾으러 오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덧붙였다.

“그 여자 때문에 우는 거면, 이제 그만 그쳐.
앞으로가 걱정돼서 우는 거면, 그건 하지 말고.
짐 다 챙겼으면 가자.”

 

나는 눈물 자국이 남은 수첩을 천천히 닫고, 캐리어를 끌었다.
속이 텅 비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걸음은 무거웠다.
사진기조차 챙기지 않았는데도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아빠는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 여자랑 관련된 건 다 버리고 와라.
너, 그 여자한테 미련 가질 정도로…
좋은 기억 있었던 건 아니잖니.”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아팠다.

들키고 싶지 않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켜보았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
그걸, 나는 이제야 확신하게 되었다.

그제야 내가 느끼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맞아서 서러운 게 아니었다.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것,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다는 것,
그게, 가장 괴로웠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울었다.
기대도 원망도, 아무 데도 닿지 못한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다 쏟고 나서야, 몸이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마음 어딘가는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쥐고 있던 수첩을 어깨 너머로 무심히 던졌다.
그리고 나도, 사진관을 가차 없이 나섰다.
아빠의 등 뒤를 따라,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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